교황 대사들에게 행한 교황 연설


오늘 오전 교황 프란치스코는 교황 대사들의 희년을 마감하면서 교황 대사들에게 다음과 같은 연설을 행했다.

친애하는 형제 여러분,

저는 희년의 기도를 바치는 이 순간 매우 기쁩니다. 이 순간은 우리 자신들이 목자들로서 자비의 뿌리들을 발견하도록 모였다는 것을 넘어서서 여러분을 통해 베드로의 후계자와 지역교회와의 일치를 새롭게 하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그 지역 교회들에서  교회의 생명과 그 메시지의 선포에 있어서 중요한 연결점인 친교를 전달하고 친교를 위해 헌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번 모임을 준비했던 국무원장 파롤린 추기경의 헌신적 준비에 감사드리고자 합니다.

여러분 모두 로마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이 희년의 시간을 함께 보내는 것은 여러분에게 있어서 특별한 의미를 지닙니다. 여기에서 여러분의 많은 기억들과 활력을 주는 것들이 현존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젊었을 때 여기에 베드로에게 봉사하겠다는 결심으로 왔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를 만나기 위해 자주 여기에 돌아왔다가 다시 그 메시지와 함께 하고 있다는 증거를 전달하기 위해서 그 파견된 자들로서 출발하곤 합니다. 여기 로마에는 교회의 시초부터 베드로가 존재합니다. 오늘날 베드로는 하느님의 섭리가 그렇게 되기를 원하셨던대로 교황의 직무속에 존재합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내일, 그리고 항상 여기에 존재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신성한 계획에 따라 그 자체로 그저 걸림돌에 불과한 무능력한 인간 본성이 무너지지 않는 바위가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저는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저의 직무를 도와 수행하는 봉사에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교회가 서 있는 신앙 고백을 교황의 입술을 통해서 받아들이려고 주의를 기울이고 있는 여러분에 감사드립니다. 또한 이 순간 성령께서 교회에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을 베드로에게 요청하신 모든 것을 그 어떤 모호성도 없는 말과 온전한 정신과 갈리지 않는 마음으로 해석하는 여러분의 충성심에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전체 교회의 목자의 마음을 ‘청진기로 듣듯이’ 듣고 그 숨결을 제가 사랑으로 사목하도록 소명된 지역 교회까지 도달하도록 하는 여러분의 섬세함에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저는 여러분의 막중한 임무와 많은 어려움들로써 누벼진 여러분의 즉각적인 헌신과 너그럽게 여러분의 삶을 봉헌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 감사드리는 바입니다. 여러분은 교회의 살을 손으로 만지고 있습니다. 또한 여러분은 교회를 영광스럽게 하는 그 빛나는 광채를 체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용서를 갈구하는 상처와 못자국들도 체험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다양한 문제들과 현안들을 참된 교회정신과 겸손한 상황인식을 통해 교황의 마음속에 교회와 세상을 알려주십시오. 저는 매일 아침 저녁으로 여러분이 보내오는 지역교회의 현실들에 대한 ‘전보문들’을 읽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여러분이 파견된 국가에 상황들과 국제 사회에서 발생하는 현안들이 있습니다. 이 모든 것에 대해서 여러분에게 감사드립니다. 여러분, 매일 제가 이름과 얼굴을 떠올리면서 친구를 위한 기도를 바치고 있다는 것을 알아주시길 바랍니다. 저는 여러분을 특별히 성체성사 중에 기억합니다. 여러분은 교구장 주교들이 아니기 때문에 여러분의 이름이 그 어떤 개별교회에서도 미사중에 불려지지 않고 있지만 교황은 성찬 기도중에 내 자신이 퍼져있는 것처럼, 그리고 희생어린 권한으로 봉사하기 위해서 파견된 사람들로서 여러분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그리스도의 신부와 교회가 살아가고 있는 백성들 가운데 함께 하고 있습니다.

1. 겸손하게 파견된 사람들로서 희생을 통해서 봉사하는 것
복자 바오로 6세는 성좌의 외교 직무를 개혁하면서 이러한 글을 남겼습니다. “교황사절의 활동은 특별히 주교들과 사제들, 수도자들과 사절들이 파견된 지역의 모든 가톨릭 신자들에게 값진 봉사를 하는데 있습니다. 주교들과 사제들, 수도자들과 모든 가톨릭 신자들은 교황의 권위를 대신한다는 뜻에서 사절들로부터 보호와 의지할 곳을 발견합니다. 교황사절의 사명은 주교들이 행사하는 권한을 방해하거나 대신하면서 그 상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권한을 존중하고 신중한 형제적 권고를 통해서 그 권한을 지탱시켜주고 유익이 되도록 하는 것입니다”(모든 교회에 대한 관심(Lett. ap. Sollicitudo omnium Ecclesiarum), AAS 61[1969], 476).
일을 수행하는 가운데 여러분은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여러분이 대표하는 이의 커다란 사랑을 전달하도록 불렸습니다. 여러분은 올바로 살도록 교정시켜줄 뿐만 아니라 보호하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으로 살도록 불렸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어떤 결정을 하기 전에 먼저 경청하고 긴장을 완화하기 위해서 상호 이해와 화해를 위한 첫 걸음을 내딛을 수 있도록 도와주기 위한 임무를 수행합니다.
겸손이 결핍된 봉사는 가능하지도 그 열매를 맺을 수도 없습니다. 교황 대사의 겸손은 그가  봉사하도록 파견된 국가와 교회에 대한 사랑을 통해서 나타납니다. 그 겸손은 교황이 원했던 곳에서 침잠한 태도로 있으면서 다음 번 임지에 대해서 걱정하지 않은 다음과 같은 태도에서 나타납니다. 거기에서 갈리지 않는 마음과 온전한 정신으로 온전히 있는 것입니다. 또한 그 자신이 간직하고 있는 풍성함을 공유하기 위해서 자신의 가방을 열어 재치는 것, 그러나 아직 그 자신이 향유하고 있지 못하고 있는 받아들이기 위해서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물론 상황의 정확한 인식을 제공하고 형성할 수 있도록 있을 수 있는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삶과 교회적, 문화적, 종교적 흐름에 대한 것들을 평가하고 비교하며 조명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주시하여 검토하고 그것을 보고하는 것은 중요한 단어들이지만 교황 대사의 생활에서 그것이 다가 아닙니다. 만나고 경청하고 대화하면서 공유하여 의견을 제시하고 함께 일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할 때 참된 사랑과 친분을 나누며 그 지역의 백성과 교회에 동참하게 됩니다. 가톨릭 신자들이, 넓은 의미에서 그 사회 사람들이 알기를 원하고 또 알아야 하는 것은 교황 대사가 그들 국가에서 자기 집처럼 잘 지내는지 입니다. 자유롭고 건전한 관계를 형성하는데 행복해 하는지, 그리고 (음식, 언어, 생활방식) 매일의 삶을 공유하고 의견을 말하고 함께 하면서 존경심을 표현하는 것을 원하고 또 알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발전하도록 도와주는 시선으로 함께 하고 있는지를 말입니다.
우리와 같이 생각하지 않는 사람에 대해서 손가락질 하거나 공격해서는 않됩니다. 그것은 현재의 정치적, 문화적 전쟁의 비참한 전략일 뿐입니다. 이것은 교회의 방법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시선은 폭과 깊이에 있어서 넓고 깊어야 합니다. 양심을 형성하는 것에서 중요한 것은 애덕의 의무를 첫 자리에 두는 것이고 이것은 자신의 행동 양식에 대한 섬세한 관찰이 요구합니다.
 
현재 늑대의 참혹한 공격이 분명하게 존재합니다. 그 공격은 외부에서 들어와서 양떼를 공격하여 잡아먹는 것입니다. 그리고 양떼들을 혼란시키고 싸움을 일으키고 흩어버리고 파괴시킵니다. 늑대는 다음과 같은 양상을 띄고 나타납니다. 몰이해, 적대감, 악행, 박해, 진리를 제거하는 것, 선에 대한 거부, 애덕에 대해 폐쇄하는 것, 설명하기 힘든 문화적 적대감, 불신… 여러분은 늑대들이 만들어 내는 이 모든 종류의 시기 질투가 만들어낸 음식물에 대해서 잘 알고 있습니다. 동방의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생각해 봅니다. 혹독한 폭력이 그들에게 가해지고 있습니다. 많은 공범자들의 침묵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을 제거하려고 합니다.

어린양의 순진성이 요구되는 것이 아니라 비둘기의 양순함과 현명하고 충직한 종의 지혜로운 판단력이 요구됩니다. 눈을 뜨고 어디에서 그 적대감이 오는지를 인식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원인들을 제거할 수 있는 가능한 방법들을 식별하고 그 적대감과 맞서는 것이 필요합니다. 저는 폐쇄적인 상황에 속에 머물지 말라고 촉구합니다. 그리고  슬픔에 빠지지 말고 우리를 비판하는 사람들의 희생자들이 되는 유혹에 빠지지 말라고 부탁드립니다. 우리를 비판하는 사람은 우리를 자극하여 훼손시킵니다. 여러분이 봉사하는 교회의 영혼 안에서 예수님이 선포하신 참된 행복의 힘과 기쁨을 울려 퍼지도록 온갖 노력을 기울이십시오(마태 5,11).

주교들과 사제들, 수도자들, 본당, 문화적 사회적 기구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데(때때로 시간을 소비하는데) 행복해 하고 준비되어 있는 것이 바로 교황 대사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이런 기회들을 통해서 직면하여 풀어야 할 교회 사목 통치상의 문제나 개인적 상황과 문제들을 인식하고 배우고 경청하고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 나가는 것입니다. 식별하고 교정하는 데 있어서 가까이 다가가 형제적 도움을 주려고 하는 것 이상으로  더 좋은 것은 없습니다. 이런 것은 정보를 얻어내서 현실과 사람들 사이에 조작하기 위한 교활한 용별술이 아닙니다. 이것은 직무상 베드로의 관심을 전달하는 도구로서 외교관에게 어울리는 태도가 아닙니다. 이것은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한 내적 능력을 갖춘 목자의 태도인 것입니다. 관료주의적 관념을 이겨내십시오. 이런 태도는 자주 여러분의 일을 지배할 수 있고 무관심으로 눈을 감은 채 그 어떤 것도 스며들수 없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교황 대사관은 단지 연례적인 축일뿐만 아니라 모든 교회 공동체가 의지할 수 있는 자문을 구할 수 있는 항구한 장소이자 ‘교황의 집’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정부의 책임자들도 단순히 외교적 업무를 위해서가 아니라 성좌의 외교라고 하는 유일하고 고유한 특성 때문에 조언을 구할 수 있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대사관이 ‘친구들과 친구들의 친구들’을 위한 안식처가 되게하지 마십시오. 중상모략질을 하고 출세를 바라는 사람들을 피하십시오.

국가 공동체와의 관계는 착한 목자의 복음적 모습에 의해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배제하고 불안하게 만들며 비참하게 하는 것이 유일한 기준점들이 될 때, 양떼의 필요와 조건, 요청들을 대변하고 인식하는 능력 있는 착한 목자의 복음적 모습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복잡성과 어려움을 대면하는데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여러분은 인간의 참된 선익을 중요하게 여기는 목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진리이신 그리스도에 대해서 말하지 못하도록 원하는 온갖 종류의 권력 앞에서 교회의 자유를 보증할 막중한 임무를 수행함에 있어서 이 자유가 단순히 완벽하고 성공적인 외교적 이해와 협약, 그리고 업무의 열매라는 착각을 하지 마십시오. 교회는 자신의 기구들이 “모든 이들, 모든 장소에서, 모든 경우에, 어떤 지체함이나 두려움도 없이 복음을 선포”(복음의 기쁨, 2항)할 수 있을 때만이 아니라 오히려 교회 자신이 복음의 진리를 거부하는 유행, 자주 목자들과 양들을 쉽게 전염시키는 편리주의를 거슬르는 반대받는 표징으로서 드러날 때 자유로울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지나가는 이 세상의 권력에 종속되고 그 편의 주의에 하느님의 말씀을 축소시키고 이념의 홍수 속에서 살아있는 바위, 베드로를 대변한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러므로 정치적인 줄이나 이념 논쟁과 결혼하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교회의 영속성은 궁궐이나 품격높은 홀에서 주고 받는 동의에 의존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으신 그 주님께 대한 충성심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입니다(마태 8,18-22). 

신부인 교회는 그 신랑의 뚫린 늑방이 나니면 그 머리를 둘 수 없습니다. 바로 거기서 교회의 참된 힘, 자비의 힘이 흘러 나옵니다. 우리는 양자적 외교관계와 다자적 외교 활동, 그리고 국제적으로 중대한 현안을 다루는 곳에서도 그 어떤 누구도 제공할 수 없는 풍요로움인 자비의 힘을 세상에 제공하지 않으면 안될 것입니다. 이런 인식은 우리로 하여금 모든 이와 대화하도록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은 많은 경우 신앙이나 인종적,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 조건 때문에 고향을 떠나온 난민들에 대해서 예언자적 목소리를 우리가 내도록 합니다. “그들의 부르짖음이 우리의 것이 되고 우리 함께 이기주의와 위선을 감추려고 지배하는 온갖 무관심 주의라는 장벽을 무너뜨릴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자비의 얼굴Bolla, 15항).

2. 목자의 마음으로 교회들을 동반하는 것

매일 대면해야 하는 다양한 문제의 복합성이 여러분을 사도적 사명에서 분리하도록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 사도적 사명은 교황의 시선으로 교회들을 동반하는 가운데 존재합니다. 이런 교황의 시선은 착하신 목자 그리스도의 시선 외에 다른 것이 아닙니다.

동반하기 위해서는 움직일 필요가 있습니다. 차갑게 작성된 보고서를 보내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을 통해 인식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복음의 좋은 씨앗이 어떻게 그 곳에서 퍼지고 있는지 보아야 합니다. 어떤 문제를 해결하거나 현안을 풀기 위해서 여러분에 사람들이 찾아오는 것을 기다리지 마십시오. 교구, 수도회, 본당, 신학교들을 방문해서 하느님의 백성이 무엇을 먹고 생각하고 요구하고 있는 이해하기 위해서 방문하십시오. 여러분은 파견된 국가와 기구, 그리고 지역 교회 차원에서 살수 있는 능력자들이 되기 위해서 ‘밖으로 나가는’, ‘들판의 병원’과 같은 교회를 표현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기다리고 있는 중요한 작업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애롭고 가까이 있어주는 목자의 영혼이 잠식되지 않도록 하십시오. 바로 이렇게 가까이 가는 것, 가까이 가는 것이 교회의 풍성함을 위해서 오늘날 필요한 근본적 조건입니다. 사람들은 동반해 줄 것을 요구합니다. 그들은 잘못된 길에 들어서지 않고 절망속에서 살지 않기 위해서 그들 어깨에 손을 올려주는 것을 필요로 합니다.

시작한 일들에 힘을 보태면서 주교들을 동반하는 것. 주교들이 받고 있는 도전들을 직면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손으로 하는 일이 아니지만 고통스런 인내의 과정을 통해서 식별하는 작업의 열매들인 해결책들을 찿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 성직자들의 질적 성숙을 위한 노력을 격려하는 것. 심도 깊은 것은 교회에 있어서 결정적입니다. 깊은 신앙, 그리스도에 대한 완전한 일치, 그리스도교 생활과 추종, 그리고 그 제자직에 대한 완전한 동의. 그저 이론적인 사목적 계획과 식상한 우선적 원칙으로는 되지 않습니다. 가까이 함께 머물면서 구체적으로 동반할 필요가 있습니다. 동반할 필요가 있습니다.

저의 근심 걱정은 미래의 주교들을 뽑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해서 저는 2013년에 여러분에게 말한 바 있습니다.  얼마 전에 주교성과 대화하면서 오늘날의 교회에 필요한 목자들의 모습을 그려보았습니다. 부활하신 분에 대한 증인들입니다. 이력이 화려한 사람이 아니라 말입니다. 기도하는 주교, ‘고상한’ 것들과 가까이 지내면서 ‘저속한 것’에 파묻히지 않은 사람. 하느님의 현존 속에 ‘인내’를 통해 침잠할 수 있는 주교. 그래서 그에게 맡겨진 복음을 배반하지 않는 자유를 소유한 사람. 목자로서 주교. 임금이나 기능인이 아닌 주교. 부탁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마음 속으로 당신 교회를 인도하시기 위해 이미 당신 마음 속에 담아두셨던 이들을 교회 안에서 찾아내는 임무의 복합성은 여러분이 수행하는 임무의 본질적 부분을 차지합니다. 여러분은 그 작은 다윗들이 어디에 숨겨져 있는 찾아내기 위해서 들판을 조사해야 할 의무를 지닌 첫 번째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느님은 그런 사람들을 보내주십니다! 만일 우리가 항상 어항 속에 가서 물고기를 잡으려 한다면 잡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찾아나서야 합니다. 하느님의 마음으로 들판에 나가야 합니다. 그리고 고정된 어떤 기준을 갖고 찾아나서지 말아야 합니다. 찾아내려는 시선, 그리고 추구하는 것을 다루면서 평가하는 기준들은 헛된 목적들로 기술될 수 없습니다. 그 헛된 목적들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가  꿈꾸는 교회를 책상 위에서 생각하고 맙니다. 그러므로 그물을 호수에 던져야 합니다. 작은 어항과 예비 후보군 혹은 ‘친구들의 친구들’을 사육함으로써 사람들 찾아내는 데 만족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역사와 교회의 주님께 대한 믿음의 문제이며 주님은 교회의 선익을 잊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회피해서는 않됩니다. 지금 말하고자 하는 질문은 실천적인 것입니다. 또 다른 사람은 없습니까? 다윗의 아버지에게 사무엘이 던진 질문입니다. “다른 사람은 없습니까?”. 찾아 나서야 합니다. 있습니다, 있습니다!

3. 그리스도의 교회가 존재하는 곳의 백성들을 동반하는 것

외교 업무는 교회와 세상에 대한 베드로의 후계자의 밝게 떠있는 눈입니다.  여러분에게 당부합니다만 그 고귀한 사명의 지고함에 머무십시오. 여러분은 그것을 위해 계속해서 준비해야 합니다. 변하는 주제들에 대해서 어떤 지식을 얻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루한 일상의 상황을 깊이 새기면서 현실적으로 변하고 있는 것을 바라보고 새로움을 평가하면서 균형있게 해석하고 구체적 행동을 권고하는 생활의 양식과 업무상의 규칙을 말하는 것입니다. 

시대의 빠른 변화는 한 번에 모든 것을 제공하지 못한다는 것을 전제하면서 평생 교육을 요구합니다. 과다한 업무, 새로운 명예가 주어지지 않는 것, 반복되는 일은 지적인 게으름을 야기합니다. 그 지적 게으름은 그 부정적 결과들을 머지 않아 발생시킵니다. 지속적이고 열심하게 공부하는 것은 통합성이 결여되는 것을 방지하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런 통합성의 결여는 자신의 일을 잘 처리하기 위해서 개별적으로 노력을 하지만 다른 이들과의 협력이나 공동 작업을 등한시 하는 경우가 생기게 합니다.  여러분, 교황은 고독을 모른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저는 성인들과 독수자들처럼 그런 ‘복된 고독’을 모르는 사람이 아닙니다). 많은 대사들이 그런 고독속에 생활하고 있습니다. 저는 항상 여러분의 ‘유배자들’로서의 상황을 고려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 안에 내적 일치와 깊은 평화와 풍성함의 감각을 형성하는 중요한 기둥이 사라지지 않도록 계속해서 기도하고 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지역 교회와 국가, 국제 공동체의 현실을 지배하지 않는 개인적인 시각을 방지하기 위해서 일치되고 협력적인 망 안에서 일하는 것입니다. 개인의 카리스마, 교회적 깊은 감각, 지적인 능력의 소산일 수 있는 개인적인 시각을 제안하는 위험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주 개인적이고 감성적이며 다분히 다른 감각, 일과 협력을 조건 지우는 개인적 상황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우리 시대에는 거대한 도전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지만 그 모든 목록을 제시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어쩌면 그러한 것들의 뿌리를 파헤쳐 보는 것이 현명할 것입니다. 이토록 상처입고 외상이 깊은 이 세상에 자비를 분명하게 보여주어야 할 긴급성에서 성좌의 외교 업무는 제외된 것이 아닙니다. 자비는 교황 대사의 외교적 사명의 중요한 전문입니다. 교황 대사는 개인적인 윤리적 노력을 넘어서 하느님의 자비가 이 세상과 사회, 모든 인간 집단, 가정, 백성들과 국가 안에서 파고들어야 한다는 확신을 소유해야 합니다. 국제 관계에 있어서도 성좌의 외교 사명은 그 무엇도 그 누구도 잃어버리지 않았다는 것을 수반해야 합니다. 인간 존재는 회복 불가능하지 않습니다. 그 어떤 상황도 인간 존재와 그 목적과 관련하여 자상하시며 선하신 하느님의 권능을 중지시킬 수 있는 상황은 없습니다.

교황청 외교 사명에 대한 근본적 새로운 이해는 교황 대사를 정치, 지리적, 경제적이거나 군사적 관심에서 자유롭게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이해는 대사가 정부간 대화, 정치적 사회적 관계, 그리고 공적 기구들 안에서  공동선에 봉사하려는 열망을 식별하게 하고 그것을 우선시하도록 자극하도록 합니다. 물론 국가주의적이거나 인기 영합적인 이념에서 출발한 것들에 의해서 또는 개인적, 집단적 이해 관계에 따라서 이런 가치가 흐려지거나 사장되더라도 말입니다.

교회는 오늘이란 현실을 과소평가하지 않으면서 눈에 띄는 결과에 사로잡히지 않고 계속해서 일하도록 소명되었습니다. 교회는 어려운 상황과 역행하는 상황들, 현실의 역동성이 강요되어 계획을 변경해야 하는 상황을 인내롭게 소화해야 합니다. 완성과 한계 사이에는 항상 긴장이 존재할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에 필요한 것은 권력과 자기 확신이 아니라 좋은 씨앗이 태어나서 자라나게 하는 것, 그리고 그 발전을 인내롭게 동반하면서 얻을 수 있는 어떤 일시적인 결과들로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름답게 완성되었고 이제 수확을 거둘때가 되었음에도 갑작스런 거센 폭풍으로 모든 것이 상실된다고 해도 용기를 잃지 말아야 합니다(요한 4,35.참조). 신뢰를 갖고 새롭게 시작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미 이룩된 단계부터 다시 출발해야 합니다. 뒤로 돌아가지 말고 인간과 기구들에게 유익이 되게 하는 모든 것을 촉진하면서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그 어떤 고뇌도 없이, 분명하고 부드러운 동의를 통해서”(복음의 기쁨. 223항) 말입니다. 

사람들과 공적 기구들과 신뢰를 갖고 대화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파악하기 쉽지 않은 세상과 대면해야 합니다. 권력의 중심과 많은 이들은 스스로 잊혀진 이들이고 실현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면서 용기를 잃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사람들이 아직도 서로 다가갈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인간 안에는 하느님의 음성이 울려 퍼지는 내적 공간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명확함을 갖고 대화하십시오. 그리고 자비가 진리의 아름다움과 힘을 흐리게 하거나 감소시킬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 걱정하지 마십시오. 진리는 오직 자비 안에서 충만하게 완성됩니다. 여러분은  역사와 생명의 마지막 말은 분쟁이 아니라 일치라는 점에 확신을 가지십시오. 모든 인간은 그 일치를 갈망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드라마틱한 싸움이 변화시킨 그 일치는 우리 평화의 샘에입니다. 왜냐하면 바로 거기에 분리라고 하는 성벽은 무너지기 때문입니다(에페 2,14. 참조).

친애하는 형제 여러분,

기쁨으로 가득찼던 이 형제적 만남의 날들을 보내면서 저는 여러분을 다시 파견합니다. 결론적으로 저는 복음의 기쁨에 여러분을 의탁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두려움과 어둠에 사로잡혀서는 안될 것입니다. 여명과 부활하신 분의 빛 속에 머물러야 합니다.

세상은 두려움, 많은 두려움에 가득차 있고 그것을 전파하고 있습니다. 자주 세상은 그 두려움이란 열쇠로  역사를 읽어내려가곤 합니다. 그리고 장벽과 해자들로 이루어진 세상을 건설하기 위해서 그 비극적 상황들을 사용합니다. 우리는 두려움의 근거들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받아들이지 맙시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비겁함의 영을 주신 것이 아니라, 힘과 사랑과 절제의 영을 주셨습니다” (2 티모 1,7).

그 정신에서 목을 축이십시오. 그리고 가서 문을 여십시오. 그리고 다리를 건설하고  연결 고리를 만드십시오. 우정을 만들면서 일치를 이루십시오. 여러분은 기도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침묵의 성체 흠숭을 간과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여러분이 행하는 모든 일의 참된 원천입니다.

두려움은 항상 어둠 속에 자리잡고 있지만 약한 것이고 그것은 지나가는 것입니다. 미래는 빛의 영역에 속합니다. 미래는 우리에게 속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리스도에게 속해있기 때문입니다! 감사합니다.

정오가 되었는데 삼종기도를 바치기로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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