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실현된 무언가에 대한 기다림인 그리스도인의 희망!


프란치스코 교황은 바오로 6세 홀에서 열린 일반 알현에서 그리스도인의 희망이라는 주제에 대한 교리 교육을 이어갔습니다:

«지난 교리 교육에서 우리는 희망이라는 주제에 대해 구약 성경의 몇몇 페이지를 다시 살펴보면서 우리들의 대화를 시작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희망이라는 덕이 예수님과 부활 사건에 의해 대표되는 새로움과 만날 때, 신약성경 안에서 가지는 특별한 중요성에 대해 살펴보려고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희망. 우리 그리스도인은 희망의 사람들입니다».

«이것은 처음으로 쓰여진 바오로 사도의 테살로니카인들에게 보낸 첫 번째 편지에서부터 명확하게 드러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들은 성경 구절에서 첫 번째 복음 선포의 아름다움과 신선함에 대해 알아챌 수 있습니다. 테살로니카 공동체는 생긴지 얼마 되지 않은 공동체였습니다; 그렇지만, 많은 어려움과 시련에도 불구하고 신앙 안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고, 열정과 기쁨을 가지고 주님의 부활을 기념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의 부활 안에서 다시 태어난 테살로니카인들이 그리스도와의 충만한 친교에 힘입어 진정으로 “빛의 자녀요, 대낮의 자녀”가 된 것에 대해 모두와 함께 진심으로 기뻐합니다».

«바오로 사도가 테살로니카 공동체에 편지를 쓸 때, 그 공동체는 이제 막 생겨난 공동체였고, 주님의 부활 사건과도 몇 년 떨어져 있지 않았습니다; 정말, 몇 년 후였습니다! 이 때문에 바오로 사도는 이 유일하고도 결정적인 주님의 부활 사건이 역사와 개개인의 삶에 가져오는 효과와 결과들을 이해하게 하려고 노력합니다. 특별히, 공동체의 어려움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 모두가 그것을 믿고 있었습니다 -, 죽은 이들의 부활에 대한 믿음에 있었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테살로니카인들에게 보낸 이 편지는 실제적인 것들을 드러내 줍니다. 우리가 자신의 죽음 앞에 위치하게 될 때 마다, 아니면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앞에 서 있을 때 마다, 우리는 우리들의 믿음이 시험을 당하고 있음을 느낍니다. 모든 의혹과 우리들의 연약함이 드러나고, 우리는 스스로에게 질문합니다: “정말로 죽은 후의 삶이 존재할까…? 내가 사랑했던 사람들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며칠 전 일반 알현 때 어떤 부인이 제게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제가 가족들을 다시 만나게 될까요?” 의심이었습니다…우리 역시 이런 맥락에서 주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것을 생각하고, 우리들의 죽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살펴보면서 우리 신앙의 뿌리와 기초로 다시 돌아가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이런 불확실성 때문에 죽음에 대해 어느 정도 두려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닙니까? 여기 바오로 사도의 말씀이 있습니다. 다음과 같이 말했던 나이가 많고 훌륭한 노인이 기억납니다: “저는 죽음이 두렵지 않습니다. 저는 죽음이 다가오는 것을 보는 것이 두려울 뿐입니다”. 그는 이것을 두려워했습니다».

«공동체의 두려움과 당혹감 앞에서 바오로 사도는 시련과 삶의 어려운 순간에 “구원에 대한 희망”을 투구처럼 머리에 쓰라고 초대합니다. 투구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희망이라는 것입니다. 희망에 대해 말할 때, 단어의 일반적인 의미에 따라서 희망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우리가 바라는 아름다운 것, 그러나 실현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것과 관련해서 말입니다. 우리는 이루어지기를, 그러나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기를 바라지 않습니까? 예를 들면, “나는 내일 날씨가 좋기를 바래” 하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음날 날씨가 나쁠 수 있다는 것을 압니다…그리스도인의 희망은 이와 같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의 희망은 이미 실현된 무언가에 대한 기다림입니다.

«저기에 문이 있고, 나는 그 문에 도달하기를 희망합니다! 무엇을 해야 합니까? 문을 향해 걷는 것입니다! 내가 문에 도달하게 되리라는 것은 확실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희망 입니다…그리스도인의 희망은 이미 실현된 것에 대한 기다림이고, 우리 각자에게 그것이 확실히 실현될 것이라는 것에 대한 기다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과 사랑하는 죽은 이들의 부활은 일어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무언가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 안에 근거를 두고 있는 확실한 현실입니다. 그래서, 희망한다는 것은 기다림 안에서 살아가는 것을 배우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기다림 안에서 살아가는 것을 배우는 것, 그리고 생명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한 여인이 자신이 아이를 가졌다는 것을 알게 되면, 매일 태어날 아기의 얼굴을 보게 되리라는 기다림 안에서 살아가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우리 또한 이러한 인간적인 기다림으로부터 배우면서 살아가야 하고, 주님을 보고 만나게 되리라는 기다림 안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은 쉽지 않지만, 배우게 됩니다: 기다림 안에서 살아가는 것! 희망한다는 것…그것은 겸손하고, 작고 비천한 마음을 의미합니다. 작고 비천한 사람만이 기다릴 수 있습니다. 자신감과 재화가 풍부한 사람은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이를 신뢰하지 않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또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살아 있든지 죽어 있든지 당신과 함께 살게 하시려고,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셨습니다”(1테살 5,10) 라고 쓰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언제나 커다란 위안과 평화의 근원이 되었습니다. 또한 우리는 우리를 떠난 사랑하는 이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살고 그분과 함께 하는 충만한 친교 안에 머무를 수 있도록 기도하라는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테살로니카인들에게 보낸 편지 안에 제 마음에 무척 와 닿았던 표현이 있습니다. 그것은 희망의 확실함으로 저를 채워주었습니다: “우리는 늘 주님과 함께 있을 것입니다”(1테살 4,17).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모든 것은 지나갑니다. 그러나 죽음 후에 우리는 영원히 주님과 함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희망에 대한 전적인 확실성이고, 아주 오래 전에 욥에게 경탄하며 외치게 했던 것과 같은 것입니다: “나는 알고 있다네, 나의 구원자께서 살아 계심을. 그분께서는 마침내 먼지 위에서 일어서시리라…내가 기어이 뵙고자 하는 분, 내 눈은 다른 이가 아니라 바로 그분을 보리라”(욥 19,25.27).

«그렇게 영원히 우리는 주님과 함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믿습니까? 여러분에게 질문합니다: 믿습니까? (“예” 라는 대답…) 조만간? 우리의 믿음에 조금 보탬이 되게 하기 위해 여러분에게 저와 함께 이 구절을 세 번 외치자고 초대합니다: “우리는 늘 주님과 함께 있을 것입니다!” 모두 함께 외칩시다: “우리는 늘 주님과 함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늘 주님과 함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늘 주님과 함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주님과 함께 우리는 다시 만나게 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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