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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수난 예절] 십자가는 세상의 유일한 희망

주님 수난 예절을 거행하는 프란치스코 교황 - ANSA

주님 수난 예절을 거행하는 프란치스코 교황 - ANSA

15/04/2017 16:22

                              카푸친 작은 형제회 라니에로 칸탈라메사 신부

                                   유일한 희망인 십자가를 경배하나이다

                                          십자가, 세상의 유일한 희망

                                2017년 성금요일 강론, 성 베드로 대성당

우리는 그리스도의 수난기를 들었습니다. 폭력적인 죽음의 보고서에 대한 내용 입니다. 죽음에 관한 소식, 폭력적인 죽음에 관한 소식은 매일 저녁 뉴스에 항상 전해집니다. 지난 주님 수난 성지 주일에 이집트에서 죽임을 당한 콥트정교회 38명의 신자들 소식처럼, 또한 최근 며칠 사이에 죽음에 대한 소식들을 들었습니다. 이러한 소식들은, 하루 전 날의 소식들을 잊어버릴 정도로, 아주 빠르게 연이어 일어납니다. 그런데 왜 2000년이 지난 지금도 세상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마치 어제 일어났던 것처럼, 아직도 기억합니까? 이 죽음은 죽음의 모습을 영원히 바꾸었습니다. 이 죽음은 모든 인간의 죽음에 새로운 의미를 주었습니다. 잠깐 동안 여기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예수님께 가서는 이미 숨지신 것을 보고 다리를 부러뜨리는 대신, 군사 하나가 창으로 그분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러자 곧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요한 19,33-34).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셨을 때, 당신이 어떤 권위를 가지고 성전에서 장사꾼들을 쫓아내느냐고 묻는 사람에게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요한 2,19). 그 상황에서 요한은 “그분께서는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요한 2,21)라고 설명했습니다. 여기 지금, 같은 복음 사가가 이 “파괴된” 성전의 옆구리에서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고 우리에게 증언합니다. 성전 어귀에서 한 줄기의 물이 솟아나서 처음에서 작은 시냇물이 되고, 그 다음에는 배가 다닐 수 있는 강이 되어 그 주위에는 여러 생명이 피어나게 되는, 미래의 하느님 성전(에제 47,1 이하)을 말하는 에제키엘 예언자의 예언에 대한 확실한 언급입니다.

이 “생수의 강”(요한 7,38)의 근원 안으로, 곧 그리스도의 고통 받는 마음 안으로 들어 갑시다. 묵시록에서,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제자가 “어좌와 네 생물과 원로들 사이에, 살해된 것처럼 보이는 어린양이 서 계신 것을 보았다”(묵시 5,6)고 기술했습니다. 살해된, 그러나 서 있는, 곧 고통 받고 있으나 부활하여 살아 계십니다.

이제는, 삼위일체 안에 그리고 세상 안에, 은유적일 뿐 아니라 실제적으로 박동치는 사람의 가슴이 있습니다. 사실, 그리스도께서 죽음에서 부활하셨다면 그분의 마음 역시 죽음으로부터 부활했습니다. 마음은, 신비롭지만, 새로운 차원으로 실제적으로 그분 몸의 다른 부분처럼 살아 있습니다. 만약 어린양이 “살해되었지만 서 있는” 모습으로 하늘에서 살아 있다면, 그분 마음 또한 똑같은 상태를 공유합니다. 고통 당하지만 살아 있는 마음입니다. 영원히 살아 있기에 영원히 고통 받습니다.

인류의 근본을 가득 채우는 악함의 절정을 설명하기 위해서 만들어낸 표현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어두운 마음”입니다. 그리스도의 희생 후에, 어두운 마음의 심연에서 빛의 마음이 박동칩니다. 사실,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이 되시면서 삼위 일체를 버리지 않으신 것처럼, 하늘에 오르시면서도 땅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때가 차면 모든 것이(성무 일도의 후렴구) 그리스도를 머리고 하고 하나가 되도록, 하느님께서 미리 계획 하셨도다.” 이것은 중세 시대의 신비주의자가 “죄는 피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모든 것이 잘 될 것입니다. 모든 일이 잘 될 것입니다”(율리아나 노리치)라고 칭송했던, 거역할 수 없는 그리스도인의 긍정을 설명 합니다.

카르투시오 수도사들은, 그들 수도원 입구에 새겨져 있고 그들 공식 문서나 다른 경우에 쓰고 있는, 하나의 문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문장은 지구 모양입니다. 지구본 위에는 십자가가 세워져 있고, 주위에는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세상은 돌지만, 십자가는 우뚝하다”(Stat crux dum volvitur orbis). 세상의 혼란 속에서도 십자가는 굳건 합니다.

“요동치는 세상” 속에서 중심을 잡고 있는 이 위대한 나무, 이 십자가는 무엇을 나타냅니까? 십자가는 폭력과 불의, 증오와 거짓, 그리고 “악”이라 불리우는 모든 것들에 대한 하느님의, 되돌릴 수 없고 최종적인, “거부” 입니다. 또한 동시에, 사랑과 진리 그리고 선에 대한, 그만큼 되돌릴 수 없는 “확신” 입니다. 죄에 대해서는 “거부”이며, 죄인에 대해서는 “받아들임” 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전 삶을 통해서 실천하신 내용입니다. 이것을 이제 당신의 죽음을 통해서 최종적인 것으로 축성합니다.  

이렇게 구별하는 이유는 명확합니다. 죄인은 자신의 모든 타락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창조물이며 자신의 존엄성을 간직합니다. 그러나 죄는 그렇지 않습니다. 죄는 탐욕의 열매이고 “악마의 시기”(지혜 2,24)이며 거짓된 실제입니다. 말씀께서 사람이 되실 때 죄를 제외하고 인간의 모든 것을 취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숨을 거두시기 전에 천국을 약속해준 선한 죄수가 바로 살아 있는 증거입니다. 그 누구도 절망해서는 안됩니다. 그 누구도 카인처럼 “그 형벌은 제가 짊어지기에 너무나 큽니다”(창세 4,13)라고 말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세상을 배척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세상을 위해서 “존재”합니다. 인간 역사 안에 존재했고 존재하며 그리고 존재할 모든 고통에 의미를 주기 위해서 존재합니다. “예수님께서 니코데모에게 말씀하셨듯,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입니다”(요한 3,17). 십자가는, 마지막 승리는 다른 이들 위에 군림하는 사람의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해서 승리하는 사람의 것이며, 고통을 주는 사람의 것이 아니라 고통 받는 사람의 것이라는, 살아있는 선언입니다.

세상은 발전해 가고 있지만, “세상은 돌아 갑니다”(Dum volvitur orbis). 인간 역사는 한 시대에서 또 한 시대로 넘어가는 많은 변화를 알고 있습니다. 석기 시대, 청동기 시대, 철기 시대, 제국주의 시대, 원자력 시대, 전자 시대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날에는 무엇인가 새로운 것이 있습니다. 과도기라는 개념은 더 이상 역동적인 현실을 설명하기에 부족합니다. 변화라는 개념 옆에 파괴라는 개념도 함께 두어야 합니다. 누군가가 말한 것처럼, 우리는 “유동성”의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확실한 것이 더 이상 없습니다. 우리가 매달릴 수 있는 확실한 가치나 바다의 암초와 같은 것이 없습니다. 하다못해 부딪쳐 깨뜨려 버리려고 하는 것도 없습니다. 모든 것이 유동적입니다.

철학자는, ‘초인’에 의한 신의 죽음을 선포했습니다. 또 신의 죽음이 가져올 두려운 미래에 대해 역설적으로 말했습니다. “이 지구를 태양의 사슬로부터 풀어놓았을 때 우리는 무슨 일을 저질렀는가? 지구는 이제 어디로 움직이고 있는가?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모든 태양들로부터 멀어져 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계속 추락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뒤로, 옆으로, 앞으로, 모든 방향으로 말이다. 아직도 위와 아래가 존재하는가? 우리는 무한한 무를 통과하는 것처럼 방황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프리드리히 니체, 『즐거운 학문』, 125).

“신을 죽이는 것은 가장 참혹한 자살이다”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우리가 보고 있는 것입니다. “신이 태어나는 곳에는 사람이 죽는다”(장 폴 사르트르) 라는 것은 맞는 말이 아닙니다. 그 반대입니다. 신이 죽는 곳에서는 사람도 죽습니다.

지난 세기 후반의 초현실주의 화가 한 명(살바도르 달리)이 그린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는 이 상황을 예언한 것 같습니다. 비현실적인 분위기의 커다란 십자가 그림입니다. 뿐만 아니라, 밑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는, 위에서 내려다 보는 시각으로 그려진 십자가 위의 그리스도 역시 거대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 아래에는 단단한 땅이 아니라 물이 있습니다. 십자가는 하늘과 땅 사이에 세워져 있지 않고, 하늘과 세상의 물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비극적인 이 그림의 배경에는 핵폭탄 구름과 같은 구름이 그려져 있습니다. 여기서 위로가 되는 확신 한 가지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유동적인 우리 사회를 위한 희망입니다. 이 그림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있기” 때문에 희망이 있습니다. 매년 성금요일 전례가, 베난지오 포르투나토 시인의 “세상의 유일한 희망인 십자가를 경배하나이다”(O crux, ave spes unica)라는 말을 우리에게 반복해서 외치게 하는 것입니다.

네, 하느님은 죽으셨습니다. 당신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죽으셨습니다. 하지만 무덤 안에 남아 계시지 않고 부활하셨습니다. 오순절에 베드로 사도가 군중들에게 외칩니다. “여러분은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살리셨습니다”(사도 2,23-24). 그분은 “죽었지만, 영원무궁토록 살아 있는” (묵시 1,18) 분이십니다. 십자가는, 과거의 일을 기억만 하고 있거나, 단순한 표징처럼 세상의 혼란 속에서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십자가는 세상 안에서 살아 있고 행동하고 효력 있는 현실로 존재합니다.

우리는 사회학자들처럼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에 대한 분석에만 멈추어 있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것 저것 설명해주기 위해서 오시지 않고, 사람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어둠의 마음은 단지 정글 안에 숨겨진 사악함이나 그것을 만들어낸 사회만이 아닙니다. 정도는 다르지만 우리 각자 안에 있습니다.

이것을 성경은 돌로 된 마음이라고 부릅니다. 하느님께서 에제키엘 예언자를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너희 몸에서 돌로 된 마음을 치우고, 살로 된 마음을 넣어 주겠다” (에제 37,19). 돌로 된 마음은 하느님의 뜻 앞에, 형제들의 고통 앞에 닫힌 마음입니다. 만족함 없이 재물을 모으는 마음입니다. 자녀들에게 물 한 잔 줄 수 없어서 절망하고 있는 사람 앞에 무관심하게 있는 마음입니다. 더러운 욕정에 전적으로 휘둘려 버리는 마음입니다. 욕정에 의해서 살인을 저지르거나, 이중적인 생활로 이끌리는 마음입니다. 항상 다른 이들과 외부로 향하는 시선에 머물러 있지 않기 위해서 더욱 더 실제적으로 외쳐야 합니다. 근본적으로 아직 “우리 자신을 위해서” 살고, “주님을 위해서” 살지 않는 다면, 하느님의 사제들로서, 열심한 신자들로서의 우리의 마음은 우리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숨을 거두실 때,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두 갈래로 찢어졌다. 땅이 흔들리고 바위들이 갈라졌다. 무덤이 열리고 잠자던 많은 성도들이 되살아 났다”(마태 27,51ss)라고 쓰여 있습니다. 이 표징은, 통상적으로 미래의 일을 설명하기 위해서 필요한 하나의 상징적인 언어처럼, 묵시록적인 인상을 줍니다. 또한 상징들은 교훈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수난을 읽고 묵상하는 사람의 마음 안에 와야 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오늘과 같은 전례에서 성 대 레오 교황께서 신자들에게 말했습니다. “구세주의 고통 앞에서 인간 본성은 떨고 있습니다. 믿지 않는 자들의 바위 같은 마음이 부서집니다. 자신들의 죽음의 무덤 안에 갇혀 있던 자들의 마음이, 자신들을 억누르고 있던 돌을 제치고, 밖으로 나옵니다” (강론 66,3; 『라틴 교부 총서(PL)』 54,366).  

예언자들을 통해서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살로 된 마음은 이젠 세상 안에 존재합니다. 우리가 “성심”으로 공경하는, 십자가에서 고통 받는 그리스도의 마음입니다. 성체를 모심으로써 그 마음이 우리 안에서 박동친다는 것을 확신을 가지고 믿읍시다. 잠시 후,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성전에서의 세리처럼, 마음 깊은 곳에서 외칩시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우리 역시 그 세리처럼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갑시다(루카 18,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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