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렌조 밀라니 신부에게 헌정된 “책의 시대”에 보내는 교황의 영상메시지


프란치스코 교황은 밀라노에서 개최된 “책의 시대” 도서 전시회에 즈음하여 바르비아나 학교의 교장 로렌조 밀라니 신부에게 헌정된 영상 메시지를 보냈다. 4월 24일 오후 개최된 이 전시회에서는 메리디아니 몬다도리 출판사의 문집으로 역사가인 알베르토 멜로니가 엮은, 미 발간된 작품을 포함하여 사제의 “전집” 완간이 소개될 예정이다. 영상메시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저는 주간에도 여러 번 죄의 용서를 빌 필요가 있기 때문에 결코 교회에 반대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를 떠났을 때 죄의 용서를 구하러 다른 누구에게 가야 할지 저는 모르겠습니다.” 1958년 10월 10일, 바르비아나 학교장이었던 로렌조 밀라니 신부는 이렇게 썼습니다. 로렌조 밀라니 신부의 생애, 활동과 사제직을 바라볼 수 있는 전망에서 볼 때, 하느님의 자비와 교회의 모성에 자신을 맡기는 그의 행동을 제시하고 싶습니다. 우리 모두 불과 44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난, 이 토스카나 출신 사제의 수많은 작품을 읽었고, 그가 본당신부로 있었던 바르비아나 학교의 아이들과 함께 썼던 ‘어느 여교사에게 보낸 편지’를 특별한 애정을 가지고 기억합니다. 훌륭한 교육자요 교사로서 그는 의심할 여지없이 독창적인 방법을 실천했지만, 어쩌면 자주, 너무 앞서 나갔고, 그래서 이해하기 힘들고 즉시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의 친근한 교육방식은 비신자요 반성직주의자였던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것이었고, 반항적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았을 때에는, 지성적인 변증법과 때때로 지나치게 무례하다고 여길 수 있었던 솔직함이 몸에 배어 있었습니다. 그는 가정에서 익힌 이러한 특성을 1943년 개종을 한 후에도, 그리고 사제직을 수행할 때도 계속 유지했습니다. 물론 이러한 점이 마찰과 불화를 야기시켰고, 마찬가지로 교회와 사회조직의 오해도 불러일으켰음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그의 교육적인 제안,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인 선택과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에 대한 옹호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역사는 항상 되풀이됩니다. 저는 무엇보다 먼저, 그가 비록 상처를 받았지만 교회를 사랑한 신자로서, 그리고 제가 보기에 우리의 청소년들의 마음과 지성이 요청하는 바에 응답으로 생각되는 학교에 대한 비전을 가진 열정 넘친 교육자로 기억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밀라니 신부님의 말을 인용하면서 이탈리아 학교의 현실을 되짚어봅니다. “현실에 대한 개방과 동의어이기 때문에 저는 학교를 사랑합니다. 적어도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만 항상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요점을 약간 바꿀 필요가 있다는 말입니다. 학교에 간다는 것은 여러 가지 다양한 측면과 차원에서, 지성과 마음을 현실에 개방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현실을 두려워할 아무런 권리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학교는 우리가 현실을 이해할 수 있도록 가르쳐 줍니다. 학교에 간다는 것은 여러 가지 다양한 측면과 차원에서, 지성과 마음을 현실에 개방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런 점은 아주 아름답습니다! 저학년 때에는 360도로 다양하게 배우고, 그런 다음 차츰차츰 한 방향을 심화시키고 마지막에는 전문화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누군가 배우는 법을 배웠다면, 배우는 것을 배웠다는 것입니다 – 이것이 비밀입니다, 배우는 법을 배우는 것! – 배운 것이 그에게 항상 남아있게 되고, 현실에 개방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을 가르쳤던 위대한 이탈리아 교육자가 계신데, 그분은 사제였습니다. 곧 로렌조 밀라니 신부님이셨습니다. 이와 같이 저는 2014년 5월 10일, 이탈리아 교육, 이탈리아 학교를 대상으로 말했습니다. 그런데 로렌조 신부님의 근심은 반항의 결과가 아니라, 청소년들에 대한 사랑과 애정의 결과였습니다. 그의 양떼였던 청소년들을 위해, 그는 고통을 겪으며 싸웠고, 때때로 거절당하기도 일쑤였던 존엄성을 그들에게 심어주려고 애썼습니다. 그의 근심은 그리스도를 위한 사랑, 복음을 위한 사랑, 교회를 위한 사랑, 사회를 위한 사랑, 그리고 부상자들을 도와주고, 소외된 자들과 버려진 이들을 회복시켜주기 위한 “야전병원”처럼 항상 꿈꾸었던 학교를 위한 사랑으로 성장된, 영적인 근심이었습니다. 자기 권리를 방어하기 위해 솔직히 말하는 것, 아는 것, 깨닫는 것, 이해하는 것은 로렌조 신부님이 하느님 말씀의 독서와 성체성사의 집전에서 출발하여 매일매일 사용했던 동사들입니다. 그래서 그를 매우 잘 알았던 한 사제는 그에 대해“그리스도를 과다 복용”했다고 평가했습니다.

주님께서 로렌조 신부의 인생의 빛이 되셨고, 저는 그 빛이 그분에 대한 우리의 기억을 비추어주시기를 바랍니다. 십자가의 그림자가 자주 그의 인생 위에 길게 드리웠지만, 그는 늘 그리스도의 부활 신비와 교회의 신비에 참여하고 있다고 느꼈기 때문에, 자신의 영적 지도 신부에게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이 “한 명의 그리스도인 신부로 죽는 것으로 봐주었으면 좋겠다”는 염원을 표현할 정도였습니다. 고통과 다친 상처 그리고 십자가는 결코 그에게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부활의 빛을 흐리게 만들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걱정은 오직 한 가지, 곧 그의 아이들이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대로(루카 10,29-37 참조), 사람들의 피부색이나, 언어나, 문화나, 외형적인 종교를 바라보지 않고, 필요에 처한 자들을 도와주고 가장 힘없는 자들에게 고개 숙일 자세를 갖추고, 연민으로 가득 차 있고 받아들일 줄 아는 마음과 개방된 정신을 갖추고 성장할 수 있었으면 하는 걱정이었습니다. 결론을 대신하여, 시작 때와 마찬가지로, 한 번 더 로렌조 신부가 그의 아이들 중 하나이자, 젊은 공산주의자였던 피페타에게 썼던 글을 인용하겠습니다. 그 청년은 로렌조 신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일 모든 신부님들이 신부님과 같다면, 그렇다면 (…)” 그러자 밀라니 신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우리가 어떤 공원의 울타리를 함께 허물어버리게 될 날, 부자의 궁궐 같은 주택 안에 가난한 이들의 집을 짓게 되면, 피페타 기억해둬, 바로 그날 난 널 배신할거야. 그날 마침내 나는 그리스도의 한 사제로서 합당한 승리의 노래를 부를 수 있을 거야.‘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바로 그날 나는 너와 함께 하지 않을 것이고, 십자가에 못박히신 나의 주님 앞에서 너를 위해 기도하기 위해 악취를 풍기며 비가 새는 너의 허름한 방으로 돌아갈테야”(피페타에게 보내는 편지, 1950). 이제, 용서받은 죄인이라는 강한 의식을 가지고, 항상 오직 그리스도만이 우리에게 선사하시고 우리의 어머니이신 교회 안에서 만날 수 있는 위로와 은총, 빛과 온화함을 추구했던, 그리스도와 복음의 증거자로서 그를 바라보는 자로서 애정을 가지고 로렌조 밀라니 신부의 글들에 다가가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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