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 바로가기 찾기 바로가기

SNS:

RSS:

바티칸 방송국

세상과 소통하는 교황과 교회의 목소리

언어:

프란치스코 교황 \ 강론

[산타 마르타의 집 아침미사] “위로는 유흥이 아니라 주님의 평화”

프란치스코 교황

프란치스코 교황

26/09/2017 10:53

교황의 산타 마르타의 집 아침미사 강론 요지: “위로는 유흥이 아니라 주님의 평화”.

“그 누구도 주님과의 만남에서 배제되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각 사람의 삶 속에서 ‘머무시며’,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을 알아보고 그분의 평화를 받아들이기 위해 ‘이 만남을 향한 긴장 속에’ 살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9월 25일 월요일 산타 마르타의 집 아침미사 강론에서 강조했던 희망과 기쁨의 메시지다. 그러나 이 메시지는 무감각을 떨쳐버리고 ‘닫힌’ 그리스도인이 되지 말라는 초대이기도 하다.

묵상의 실마리는 “이스라엘 백성이 유배생활 중에 해방된 순간을 이야기하고 있는” 제1독서(에즈라 1,1-6)에서 얻었다. 시편(126편)에서도 반복되듯이, 이스라엘 백성은 이렇게 노래한다. “주님이 우리에게 큰일을 하셨네.” 그리고 하느님께서 어떻게 “당신 백성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도와주도록 이방인 임금의 마음을” 움직이셨는지 보면서, 행복에 젖어 이렇게 되풀이해서 노래했다. “우리는 마치 꿈꾸는 듯하였네. 그때 우리 입에는 웃음이 넘치고, 우리 혀에는 환성이 가득 찼네.” 교황은, 이들이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큰 기쁨에 잠겼다”고 지적했다.

유배 동안 이방인들에게 노래하라고 강요당했던 이스라엘 백성은 “아니, 그럴 수는 없소. 우리는 멀리 떠나왔소”라고 대답했다. “우리를 포로로 잡아간 자들이 노래를 부르라, 우리의 압제자들이 흥을 돋우라 하는구나. ‘자, 시온의 노래를 한 가락 우리에게 불러 보아라.’ 우리 어찌 주님의 노래를 남의 나라 땅에서 부를 수 있으랴?”(시편 137,3-4) “거기 버드나무에 우리 비파를 걸었네”(시편 137,2). 교황은 이렇게 설명했다. “그곳에, 나무 위에 악기가 있었지만, 기쁨이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노래를 부를 수 없었습니다. 유배의 슬픔에 젖어 있었던 것입니다.”

성경에 묘사된 유배로부터의 해방은 따라서 “주님의 방문입니다. 주님께서 당신 백성을 방문하셨고 예루살렘으로 이끌어주셨습니다.” 교황은 바로 이 “방문”이라는 단어에 초점을 맞췄다. “구원의 역사 안에서 아주 중요한” 단어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이 단어는 다음의 성경 구절에서 찾을 수 있다. “요셉은 이스라엘의 아들들에게 맹세하게 하면서 일렀다. ‘하느님께서 반드시 여러분을 찾아오실 것입니다. 그때 여기서 내 유골을 가지고 올라가십시오’”(창세 50,25). “매번 ‘해방’에 대해 말할 때마다, 하느님의 모든 구원활동은 하나의 방문입니다. 주님께서 당신 백성을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시대’에도 마귀로부터 벗어났거나 치유된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님께서 당신 백성을 찾아오셨습니다.’” 교황은 예수님께서 우셨던 사실을 떠올렸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까이 이르시어 그 도성을 보고 우시며 (...)”(루카 19,41).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대해 우셨던 것입니다. 왜 우셨습니까?”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너를 찾아오신 때를 네가 알지 못하였기 때문”(루카 19,44)이라고 교황은 강조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을 위한 가르침은 이 같이 요약된다. “주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실 때 우리에게 기쁨을 주십니다. 곧, 우리에게 위안의 상태를 가져다 주시고, ‘눈물로 씨 뿌리던 사람들이 환호하며 거두게’ 하실 것이고, ‘영적 위로’를 선사하십니다.” 교황은 이 위로가 “그 시대에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의 영성 생활에서도 얻을 수 있는 상태”라고 덧붙였다.

이 점에 관해 교황은 묵상을 세 가지 사항으로 세분했다. 곧, “위로를 기다릴 것”, 그 다음으로 “우리를 위로해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우리를 기만하는 거짓 예언자들이 있기 때문에, 위로를 식별할 것”, 그리고 “위로를 보존할 것.”

교황은 제일 먼저 “하느님의 방문에 개방될” 필요가 있는데,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우리 각자를 방문하시고, 우리 각자를 찾아오시며 만나주시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가장 약한 순간이 있을 수 있고, 이런 만남의 가장 강한 순간도 있을 수 있지만, 주님께서는 이런 식으로든 저런 식으로든, 언제나 당신의 현존을 느끼게 해주십니다.” 교황은 이어서 이렇게 덧붙였다. “영적 위로가 주어질 때, 이스라엘인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주님께서는 우리를 기쁨으로 채워 주십니다.” 따라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단지 하늘만 기다릴 것이 아니라, “이 기쁨을 기다리고, 이 방문을 기다릴” 필요가 있다. 그래서 교황은 다음과 같이 요청했다. “지상에서, 여러분은 무엇을 기다립니까? 주님과 만나기를 바라지 않습니까? 주님께서 그대를 방문해주시고 그대에게 이 멋진 위로, 당신 현존의 행복을 주시기를 원하지 않습니까?”

“어떻게 위로를 기다려야 합니까?”라는 질문이 이어졌다. 그 답변은 다음과 같다. “모든 덕성 중에서 가장 겸손한 덕, 곧 희망을 통해서입니다. 저는 주님께서 당신의 위로를 통해 저를 찾아주시리라 희망합니다. 그래서 당신을 보여주시기를, 만나주시기를 주님께 청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느님과의 만남을 향한 긴장 안에 살아가는 사람”이고, “이 만남을 가능하게 하는 위로”를 향해 살아가기 때문에, “준비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교황은 설명했다. 그리고 만일 그렇다면, “갇힌 그리스도인, 인생의 창고에 갇힌 그리스도인은, 무엇을 해야 할지 모릅니다.” 따라서 교황은 “이스라엘인들이 70년 동안 이 방문을 청했던 것처럼, 주님의 방문을 청해야 하고, 위로 받을 준비를 갖출” 필요가 있다고 거듭 강조했다. 비록 ‘작은’ 희망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더라도, 이것이 ‘여러 차례’ 되풀이되고 이 희망이 ‘재 속에 남은 불씨처럼 감춰져 있을 때 강하기’ 때문에, ‘희망’을 가지고 준비해야 하는 것이다.

두 번째 사항은 “위로를 식별하는 것”이다. 사실 “주님의 위로는, 우리가 서커스 공연을 갈 때처럼, 공통된 기쁨이 아니고, 돈으로 살 수 있는 기쁨이 아닙니다.” 교황은 주님의 위로가 “이와는 전혀 다른 것”이라고 말했다. “주님의 위로는 내면을 건드리고 그대를 움직이며 사랑, 믿음, 소망을 성장시킵니다. 그대의 죄에 대해 울게 만들고, 예수님의 수난을 관상할 때, 예수님과 함께 울게 만듭니다.” 이어 교황은 이렇게 설명했다. “참된 위로는 영혼을 하늘의 것으로, 하느님의 것으로 향상시켜주고, 주님의 평화 안에 영혼을 가라앉히기도 합니다.” 주님의 위로를 ‘유흥’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유흥이란 “좋을 때는 나쁜 것이 됩니다. 우리는 인간이기 때문에 유흥을 즐겨야 하지만”, 위로는 다른 것이다. “위로를 받게 되면 하느님의 현존을 느끼게 되고, ‘이분이 바로 주님이시구나’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티베리아 호숫가에서 제자들이 이와 똑같은 체험을 했다. 고기를 잡으러 나섰지만 그날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했을 때 물가에 서 계신 예수님을 보고 요한이 이렇게 말했다. “주님이십니다!”(요한 21,7) 그는 그분을 즉시 알아봤던 것이다. 유배 이후 이스라엘인들도 그런 체험을 했다. “그때 우리 입에는 웃음이 넘치고, 우리 혀에는 환성이 가득 찼네”(시편 126,2).

그러므로 위로가 “주어질 때” 그 위로를 알아볼 필요가 있다. 위로가 주어질 때 “주님께 감사 드려야” 한다. 우리 각자는 “나를 찾아주시기 위해, 앞으로 나아가도록 나를 도와주시기 위해, 희망하기 위해, 십자가를 지기 위해 지나가시고, 내 앞을 지나가시는 분이 바로 주님”이심을 깨달아야 한다. 교황은 여기서 “기도를 통해 준비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언급했다. 희망과 기도. “오소서, 주님, 오소서. 제게 오소서.”

마지막으로 세 번째 사항은 “위로를 보존하는 것”이다. “위로가 강하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토록 강한 위로를, (한 순간에 불과하기 때문에) 보존할 수는 없지만, 그 흔적을 남긴다는 것”도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유배에서 해방되었을 때 이스라엘인들이 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런 다음, 교황은 만남과 위로의 “이 강한 순간이 지나갈 때 무엇이 남습니까?”라고 물었다. “바로 평화입니다.” 주님의 평화야말로 “위로의 마지막 단계”다. 위로를 식별하는 단계다. 그런 상태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보십시오. 평화로운 남자, 평화를 누리는 여자. 그렇다면 우리 각자는 이렇게 자문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는 평화로운가? 내 영혼은 고요한가?”

교황의 마지막 권고는 다음과 같은 요청이었다. “구원을 향한 긴장, 이 긴장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도록 주님께 청합시다.” 이 점에 관련해 시편은 유배로부터의 귀환을 이렇게 설명한다. “뿌릴 씨 들고 울며 가던 이 곡식 단 들고 환호하며 돌아오리라”(시편 126,6). 여기서 교황은 축복으로 끝을 맺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 은총을 주시기를 바랍니다. 위로를 기다리고, 영적 위로를 식별하며 위로를 보존하는 은총을 구합시다.”

 

26/09/2017 10: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