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보 주일’ 교황 담화에 대한 홍보처 장관 인터뷰


프란치스코 교황이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 8,32). 거짓 뉴스와 평화를 위한 저널리즘”을 제목으로 한 2018년 홍보 주일 담화를 발표했다. 바티칸 라디오는 이번 홍보 주일 교황 담화와 관련해 교황청 홍보처 장관 다리오 에도아르도 비가노 몬시뇰과 일문일답을 나눴다.

비가노 장관님, 교황청 홍보처가 창립된 이래 두 번째로 발표된 홍보 주일 담화문입니다. 두 담화문 모두 성경 구절을 참고했다는 데 공통점이 있습니다. 지난해 담화문의 제목은 “내가 너와 함께 있으니 두려워하지 마라”(이사 43,5)였으며, 올해에는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 8,32)입니다.

“그러한 선택은 우연이 아닙니다. 사실, 이번 담화의 전체적 내용이 오늘날 현안을 다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난해 담화문처럼 강력하게 성경적 뿌리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교황님께서는 ‘인류가 자만과 이기심을 따를 때, 소통의 힘은 왜곡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하시고자 카인과 아벨, 그리고 바벨탑 이야기(창세 4,1-16; 11,1-9)를 사례로 들며 말씀하십니다. 히브리인들에게 보내는 서간을 어떻게 잊을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께서 예전에는 예언자들을 통하여 여러 번에 걸쳐 여러 가지 방식으로 조상들에게 말씀하셨지만, 이 마지막 때에 아드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드님을 만물의 상속자로 삼으셨을 뿐만 아니라, 그분을 통하여 온 세상을 만들기까지 하셨습니다’(히브 1,1-2). 구원의 전체 역사, 곧 신실하신 하느님과 충실하지 못했던 백성들 사이에서 지속해서 맺은 계약은 초대, 간청, 축복으로 엮인 대화입니다. 담화문에서 교황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진리이신 예수님께서 나타나시기 전까지는 그러했습니다. 이것이 교황님의 성찰에 기반한 메시지의 초석이자 ‘평화의 저널리즘 증진’을 위한 교황님의 초대입니다. ‘나는 (…) 진리다’(요한 14,6)라는 말씀은 개념적 확신이라거나 추상적 지식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인성과 신성이라는 두 가지 본성은 혼동되지 않고 개인적인 일치 안에서 공존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느님의 계시는 이 공존을 그 자체로 포함하여 진리를 관계로 표현합니다. 이것만으로도 인류를 해방할 수 있습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 8,32).”

성경 구절에서 유래한, 관계들의 자질에 관한 강한 언급이 있었습니다.

“관계적 측면에서 볼 때, 소통은 그 관계를 만들 수 있고 또한 파괴할 수 있는 점이 명백합니다.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나 바벨탑의 이야기는 이를 분명히 나타냅니다. 그뿐만 아니라 (…) 교황님께서는 담화문에서 도스토옙스키가 쓴 아름다운 글을 이렇게 인용하셨습니다. ‘자신에게 거짓을 말하고, 스스로에게 한 그 거짓말을 들으며 사는 사람은 그들 안에 있는 진리, 혹은 그들 주변에 있는 진리를 더 이상 분별할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이나 타인을 존중하지 않게 됩니다. 존중이 없으면 사랑은 중단됩니다. 이 사랑 없이 그들은 다른 이들과 자신에 대한 끊임없는 거짓말을 계속 하면서, 주의를 다른 데로 돌리기 위해 거친 쾌락들과 욕정들, 그리고 짐승 같은 악덕 행위에 빠집니다’(『카라마조프의 형제』, II, 2). 그러므로 다른 사람들과 자신과의 관계의 자질에 대해 자문해 봅시다. 교황님께서는 ‘소통은 동료애에 필수적인 방식’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관계가 독으로 오염된다면, 우리가 살 수 있는 공동체란 무엇이겠습니까?”

사회에는 문제를 복잡하게 만드는 거짓 뉴스 현상이 있습니다. 거짓 뉴스가 이러한 독의 원인이라고 볼 수 있습니까?

“거짓 뉴스는 관계를 독살하는 요소 가운데 하나입니다. 거짓 뉴스가 사실로 보일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근거가 없거나, 부분적이거나, 뻔뻔한 오류입니다. 거짓 뉴스의 문제점은 아주 분명하게도 진실성의 결여 뿐 아니라, 그것이 그럴 듯하다는 점입니다. 교황님께서는 담화문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교황님께서는 창세기에서 ‘교활한 뱀’이 ‘인류의 시작에서 처음으로 거짓 뉴스를 만들었다’고 설명하셨습니다(창세 3,1-15). 뱀의 은폐는 ‘첫 번째 형제 살인죄(창세 4장)를 비롯해 비극적 인류의 죄라는 역사를 시작했으며, 하느님과 이웃, 사회와 피조물에 반하는 수많은 악을 만들어 냈습니다.’ 거짓 뉴스는 얼굴 생김새를 모방하므로 알아내기가 어렵습니다. 악의 역동성은 선이 언제나 쉽게 달성할 수 있는 무엇이라고 보여줍니다. 이러한 거짓말 종류의 극적인 효과는 자신의 거짓을 위장함으로써 그럴듯하게 보이며, 이미 더 큰 규모의 사회 집단에 뿌리를 둔 기술, 기대, 편견 등을 압박합니다. 이러한 이유로 거짓 뉴스는 특히 교활하며, 쉽게 퍼지며, 영향력이 큽니다. 또한, 이러한 측면은 소셜 네트워크에 의해 강화되며, 쉽사리 확산됩니다. 그것이 조작적으로 사용될 때, 불관용과 증오의 형태로 이어질 수도 있습니다.”

거짓 뉴스라는 독의 해독제는 무엇입니까?

“거짓 뉴스는 편견과 경청의 무능에 따른 결과입니다. 교황님께서는 담화문에서 ‘거짓의 바이러스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해독제’가 ‘진리로 깨끗하게 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우리가 모든 형태의 소통을 방해하는 편견과 경청의 무능과 싸우고, 악순환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듣고 대화할 수 있는 역량은 인간의 성숙함을 필요로 합니다. 그것은 서로 다른 상황과 예기치 못한 상황에 적응할 수 있는 호의적 존재를 뜻합니다. 소통은 단순히 소식의 전달이 아닙니다. 소통은 유용성이며, 서로를 풍요롭게 해주고, 또한 관계를 의미합니다. 자유로운 마음과 세심하고 경의에 찬 경청만이 소통의 다리를 건설하고, 거짓 없는 평화를 누릴 수 있게 해줍니다. 이 모든 것은 우리가 특히 젊은이들의 교육을 통해 진리를 찾고 퍼뜨리는데 인내하라고 격려합니다. 복자 바오로 6세 교황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인류, 특히 그리스도교인은 추상적이거나 철학적 진리 뿐 아니라, 개별 사건의 구체적이고 일상적인 진리 탐구에 기여할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거나 진리 탐구의 잠재력을 사용하지 않음으로써 위축시켜서는 결코 안 됩니다. 만일, 그 같은 권리를 포기하거나 위축시킨다면, 그는 자신의 존엄성을 손상시키는 일이 될 것입니다’(1972년 제6차 홍보 주일 교황 담화, “진리에 봉사하는 사회 커뮤니케이션 매체”).”

언론인과 기관은 어떻게 이 담화 내용을 실천에 옮길 수 있겠습니까?

“무엇보다 저는 홍보 담당자들의 책임이 이 논쟁의 핵심이라고 생각합니다. 표현의 자유와 함께, 책임은 소통 그 자체가 경청의 공간, 대화의 공간, 심지어 반대의 공간에 대한 조건을 창출합니다. 물론 일상적인 변증법과 상호 작용을 통해서 말입니다. 따라서 전문 윤리와 관련된 전제 조건에 따라, 보고된 사실이 진리라는 것도 함께 밝혀져야 하며, “절반의 진리” 혹은 “그럴듯한 이야기”에 의해 가려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저는 대중과 기관이 모두 이 과정에서 새로운 동맹을 형성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학교에서 정치 현장에 이르기까지 말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저널리즘 종사자는 신뢰도 잃고 정체성도 잃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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