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산 조반니 로톤도 성당 광장 강론 “성 비오 신부님의 세 가지 유산은 기도, 작음, 지혜”


프란치스코 교황이 (오상의 성 비오 신부 관련) 사목방문의 마지막 단계로 도착한 곳은 산 조반니 로톤도에는 렌초 피아노(Renzo Piano)가 설계했고 카푸친 (작은형제회) 수사 신부에게 헌정된 새 성당이었다. 교황이 성당의 입구 광장에서 행한 강론은 성 비오 신부의 거룩한 삶에 대한 내용으로 이뤄져 있었다. 교황은 조용히 성인의 유해를 참배하고, 유해 보관함 안에 안치될 영대를 (유리관 위에) 놓아둔 다음, 오상의 성 비오 신부가 남긴 세 가지 “유산”에 대해 잠시 멈춰 묵상했다. 이 세 가지 유산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른 것으로, “기도(preghiera)”, “작음(piccolezza)”, “지혜(sapienza)”다. 이 유산들에는 “기도 모임”과 “고통완화요양병원(Casa Sollievo della Sofferenza, 일명 ‘고통을 더는 집’)의 병자들”과 “고해소”라는 세 가지 “가시적 표지”가 포함된다. 군중이 교황에게 표현한 엄청난 애정은 산 조반니 로톤도 대교구장 미켈레 카스토로(Michele Castoro) 대주교의 목소리로 대변됐다. “교황님, 우리는 당신을 아주 많이 사랑합니다!”

찬미와 흠숭을 드리며, 지치지 말고 기도하십시오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 자리에 모인 약 3만 명의 신자들과 나눈 계속된 대화를 통해 복음 말씀에서 발췌한 내용을 중심으로 현대인이 누구인지 질문을 던졌다. 수난과 성찬례, 그리고 자비에 대한 내용에 관한 (교황의 말이 귀에 울려 퍼지는 가운데, 신자들의) 눈은, 제대를 장식한 중앙 아치의 모자이크에 가서 머물렀다. 교황은 예수님에게 있어 기도가 “옵션이 아니라, 첫 자리”라고 강조했다. 교황은 우리에게 “더 좋은 몫”(루카 10,42)인 하느님을 망각하게 하는 “결단 없는 행동주의(attivismo inconcludente)”가 종종 끼어든다고 설명했다. 교황은 이 때문에 성 비오 신부가 “예수님처럼”, “결코 지치지 말고 기도하라”고 당부했다고 덧붙였다.

“찬미에 마음을 열지 않고, 오로지 그분께 시간을 할애하지 않으며, 그분께 흠숭 기도를 드리지 않으면서, 성부를 알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흠숭의 기도, 찬미의 기도를 망각합니까? 다시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 각자는 이렇게 자문할 수 있습니다. ‘나는 어떻게 흠숭하는가? 나는 언제 흠숭 기도를 드리는가? 나는 언제 하느님을 찬미하는가?’ 흠숭 기도와 찬미의 기도를 다시 해야 합니다. 하느님과 한층 더 깊은 친교에 들어가는 비밀은 얼굴을 마주 보며(a tu per tu), 주님 앞에서 침묵 중에 머무는 개인적인 만남입니다. 기도는 즉각적인 개입과 같이, 청원처럼 발생할 수 있지만, 찬미와 흠숭 기도 안에서 성장합니다.”

기도는 안정제가 아니라, 삶을 하느님께로 이끄는 것

교황은 “세상의 삶을 하느님께로 이끄는 것”과 “사랑의 몸짓” 등이 결국 예수님의 기도와 닮은 기도라며, “가끔 거는 비상 전화” 혹은 “일정하게 복용해야 하는 안정제”는 아니라고 단언했다. 교황은 이런 이유로 성 비오 신부가 우리에게 “기도 모임”을 남겼다고 상기시켰다.

“그래서 만일 우리가 형제들을 신뢰하지 못한다면, 누가 (자신의) 상황을 주님께 맡기겠습니까? 누가 전구 기도를 바칠 것이며, 누가 필요에 처한 인류에게 자비의 문을 열기 위해 하느님의 마음을 두드리려고 염려하겠습니까? 이 때문에 비오 신부님은 우리에게 기도 모임을 남겼습니다. 비오 신부님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기도는 모든 착한 영혼을 일치시키는 힘이며, 세상을 움직이고, 양심을 새롭게 하며, (...) 병자들을 치유하고, 노동을 성화시키며, 건강 지원을 향상시키고, 도덕적인 힘을 주며, (...) 모든 쇠약하고 연약한 이들에게 하느님의 축복과 미소를 확산시킵니다’(제2차 국제 기도 모임 대회에서 하신 말씀, 1966년 5월 5일). 이 말씀을 지키며 다시 한 번 이렇게 자문해봅시다. ‘나는 기도하는가? 언제 기도하는가? 찬미할 줄 하는가? 흠숭할 줄 아는가? 내 삶과 모든 사람의 삶을 하느님께 이끌 줄 아는가?’”

예수님의 신비는 오로지 작은 이들이 될 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작음”은 두 번째 핵심단어이자, 성 비오 신부의 두 번째 유산이기도 하다. 교황은 만일 하느님의 나라가 어린이들에게 계시됐다면, 그것은 “그들 자신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며”, “겸손하고, 열려있으며, 가난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만큼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을 갖췄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 작은 이들의 마음은 하느님의 신호를 탐지하고 즉시 알아채는 안테나와 같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이들과 접촉하려고 애쓰시지만, 스스로 위대한 사람이라고 자처하는 이들은 큰 혼선을 야기시키기 때문에, 하느님을 열망하는 것에 도달하지 못합니다. 자기 자신으로 가득 차있을 때, 하느님을 위한 자리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분께서는 (철부지 어린이 같은) 작은 이들을 사랑하셨고, 그들에게 드러내셨습니다. 그분을 만나는 길은 자신을 낮추는 길, 내적으로 스스로 작아지는 길, 필요에 처해 있다고 스스로 인정하는 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는 작음의 신비입니다. 그분께서는 스스로를 낮추셨고, 아무 것도 아닌 이가 되셨습니다. 매번 미사에서 성체를 통해 보는 것처럼, 예수님의 신비는 작음의 신비요, 겸손한 사랑의 신비입니다. 이 신비는 오로지 작은 이가 되고 작은 이들을 만날 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버림의 문화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을 한 켠에 놓아둡니다

오전에 고통완화요양병원(Casa Sollievo della Sofferenza, 일명 ‘고통을 더는 집’)의 어린이들 사이에서 느꼈던 감동으로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 장소를 “하느님의 총애를 받는 수많은 작은 이들”이 모여 있고, 따라서 하느님을 “찾고” “발견”할 수 있는 “특별 성지(speciale santuario)”라고 말했다. “작은 이들을 돌보는 사람”은 “하느님 편에 서있고 버림의 문화를 이깁니다.” 그 반대의 경우에는 “권력자들을 총애하고, 가난한 이들을 쓸모 없다고 여깁니다. (...)” 여기서 교황은 개인적인 기억을 떠올리며 오늘의 세상에 강력하게 경고했다.

“제가 어린 시절에 다닌 학교에서 스파르타인들의 역사를 가르쳤습니다. 선생님은 남자 아이나 여자 아이가 기형으로 태어나면, 이런 어린 아이들이 살아 남지 않도록 그 아이를 산 꼭대기로 데려가서 던져버렸다는 이야기를 들려줬습니다. 그 이야기는 저에게 항상 충격을 주었습니다. 우리 어린이들은 ‘잔인한 일이에요!’라고 말했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더 잔인하고, 더 의도적으로, 그와 똑같이 행동합니다. 쓸모 없는 이, 생산하지 못하는 이는 버려집니다. 이것이 ‘버림의 문화(la cultura dello scarto)’입니다. 오늘날은 작은 이들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 때문에 예수님은 한 쪽으로 버려졌습니다.”

성인에 대해서 경탄만 하지 말고, 성인의 지혜를 본받읍시다

교황은 성 비오 신부가 남겼던 세 번째 유산인 “지혜”와 그의 “가시적 표지”인 “고해소”를 언급하려고, 성경 구절과 함께 “참된 지혜”의 본질을 상기시켰다. 이는 “큰 재능을 지니는 것”이 아니고, “힘을 과시하거나” 혹은 “악을 악으로 갚는 것”도 아니며, 오히려 “신앙으로 활성화된 사랑을 갖고 악의 힘을 무장해제하는 것”이다.

“성 비오 신부님은 전 생애를 통해 악과 싸우셨습니다. 주님처럼 지혜롭게 싸우셨습니다. 곧, 겸손과 순명을 지니고, 십자가와 더불어, 사랑을 위해 고통을 바치시면서 싸우셨습니다. 그래서 모든 이들이 그분을 경탄하고 존경하지만, 소수의 사람들만이 그분과 똑같이 실천합니다. 많은 이들이 그분을 좋게 말하지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분을 본받습니까? 많은 이들이 위대한 성인들의 삶에 ‘좋아요’를 누르지만, 누가 그들처럼 행동합니까?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의 삶은 ‘좋아요’가 아니라, ‘나를 내어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선물로 바쳐질 때 그 삶은 향기를 풍깁니다. 하지만 자기 자신을 위해 사용될 때 그 맛을 잃습니다.”

영성 생활은 고해소에서 시작되고, 다시 시작됩니다

교황은 “지혜의 길”이 “구원하고” “용서하는” “하느님과의 만남”에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교황은 아무도 제외됐다고 느끼거나 필요 없다고 느낄 수는 없다고 강조했다. “성 비오 신부님은 형제들로 하여금 주님을 만날 수 있도록 (자신의) 삶과 수없이 많은 (자신의) 고통을 바치셨으며”, 그 “결정적인 수단”은 “고해성사”였다.

“고해성사에서 사랑받고 용서받는 지혜로운 삶이 시작되고 다시 시작하며, 거기서 마음의 치유가 이뤄집니다. 비오 신부님은 고해성사의 사도였습니다. 그분은 오늘날에도 고해소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어디 가십니까? 예수님께 갑니까? 아니면 그대의 슬픔으로 갑니까? 어디로 돌아가십니까? 그대를 구원하시는 분께로 돌아갑니까? 아니면 그대의 낙심 속으로, 그대의 후회 속으로, 그대의 죄 속으로 돌아갑니까? 오십시오. 주님께서 그대를 기다리십니다. 용기를 내십시오. 그분의 자비로부터 그대를 제외시킬 만큼 중대한 이유는 없습니다.”

교황이 미사에서 말했던 마지막 초대이자, 성 비오 신부의 고향에서 이뤄진 이번 방문의 마무리로 남긴 당부는 성 비오 신부가 남긴, “세 가지 표지”, 곧 기도 모임과 병자들, 그리고 고해소 안에 가시적으로 나타나는 유산을 “매일 성장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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