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과의 친교의 상징인 팔리움


팔리움(Pallium)은 영예와 관할권의 전례적 휘장이자 길 잃은 양과 자기 양떼에게 생명을 주는 착한 목자의 상징이다. 오늘날 형태는 여섯 개의 작은 십자가로 장식되어 검정 비단으로 단을 댄 폭 4-6센티미터의 흰색 양모로 된 띠다. 양쪽 끝이 가슴과 등으로 내려온다. 팔리움은 어깨를 둘러싼 고리 모양으로 되어 있는데, 왼쪽 어깨 부분으로 이어져 작은 납조각이 들어있는 두 끝이 앞뒤로 내려와 매달려 있도록 되어 있다. 가슴과 등과 왼쪽 어깨 부분에는 보석이 박힌 브로치(바늘 형태)로 장식돼 있다. 고대에는 이 세 지점에서 의복을 고정시키기 위해 사용됐다.

성녀 아녜스 축일에 이뤄지는 양모 축복

팔리움은 두 마리의 하얀 어린양의 털로 만들어진다. (이 양들은) 로마 파니스페르나의 성 로렌초 수도원의 수녀들이 기르고, 성녀 아녜스와 성녀 에메렌시아나의 유해가 지하 묘지 경당에 함께 모셔진 산타 아녜스 푸오리 레 무라 대성당(Basilica di Sant’Agnese fuori le Mura)에서 봉사하는 라테라노 의전율수회(Ordine dei Canonici Regolari Lateranensi) 수도자들이 교황에게 봉헌한다. 교회 이콘화 전통에서 어린양은 자주 아녜스 성녀와 함께 표현된다. 이 어린양들은 350년경 현재의 나보나 광장(Piazza Navona)인 치르쿠스 아고날리스(Circus Agonalis)에서 잔혹한 방식으로 순교한 로마의 성녀 아녜스를 기념하는 1월 21일 산타 아녜스 대성당(Basilica di Sant’Agnese)에서 축복을 받는다. 이 장소에는 오늘날 성녀에게 봉헌된 지하 묘지 경당이 세워져 있는데, 성녀는 이 광장에 끌려나와 양들이 죽임을 당하는 방식에 따라 칼에 찔려 순교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전통적으로 성녀와 (함께 표현된) 상징인 어린양들을 축복하는데, 이 양털이 산타 마르타의 집에서 팔리움을 만드는 데 쓰인다. 트라스테베레의 산타 체칠리아 수도원 수녀들은 방금 깎은 양털로 팔리움을 짠다.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대축일 제1저녁기도에서 새 팔리움을 축복하는 교황

프란치스코 교황은 매년 6월 29일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대축일 제1저녁기도에서 새로운 팔리움들을 축복한다. 이 팔리움들은 베네딕토 16세의 선물인 은으로 장식된 상자 안에 보관됐다가 성 베드로 대성전의 중앙제대 아래에 위치한 성 베드로의 무덤의 ‘팔리움 벽감’이라는 곳에서 다음해까지 보관된다. 관구장 대주교들에게 직접 걸어주거나 그들의 대리자를 통해 전달하기 위해 수석 부제급 추기경(cardinale proto diacono, 혹은 선임 부제급 추기경)이 로마 교황의 이름으로 여기서 팔리움을 꺼낸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개인 숙소에서 이뤄지는 팔리움의 축복예식에는 트라피스트 신부 두 명과 라테라노 대성전 의전사제단 사제 두 명, 공소원(Tribunale della Rota Romana) 원장, 교황 숙소 대기실 직원 두 사람, 교황전례원(Ufficio delle celebrazioni liturgiche del Sommo Pontefice)의 직원 두 사람이 참례한다.

팔리움의 역사

팔리움은 처음엔 교황의 독점적 휘장이었다가 6세기부터 사도좌로부터 특별한 관할권을 받은 주교들에게도 교황의 허락 하에 수여되기 시작했다. 실제로 성 심마쿠스 교황은 513년 아를의 주교 체사리오에게 팔리움을 수여했다. 9세기 중엽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하나의 관행에 따르면 관구장 대주교들은 교황에게 팔리움을 청해야 했다. 관구장 대주교들은 교회 관구를 관장하고 관구의 다른 주교들을 감독하고 보조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곧 보조역할을 하거나 관구 공의회에서 선거권을 가진 이른바 “관하 교구장들(suffraganei)”이라 일컬어지는 주교들이다. 대주교들은 서임된 후 3개월 이내에 직접 혹은 대리자를 통해 팔리움을 청해야 한다. 이 의무사항의 동기는 팔리움의 의미와 연결돼 있다. 팔리움은 관구장 대주교가 로마 교회와의 친교 안에서 자기 관구에서 행사하는 교계적 권한의 상징인 것이다.

고대의 모습으로 본 팔리움

팔리움의 가장 오래 된 모양들은 이미 유명해진 트리어의 상아로 된 것과 5세기 중엽의 유해행렬에서 나타난다. 더 분명하게는 6세기 전반기의 라벤나의 성 비탈리스의 모자이크 안에 묘사된 성 막시미아누스 주교의 모습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팔리움은 어깨에 둘러진 채 두 부분이 왼쪽 어깨에서 늘어뜨려진 스카프 형태다. 9세기 중엽부터 두 끝이 두 개의 브로치로 고정돼 아래로 늘어뜨려졌다. 정확하게 하나는 가슴 중간 부분으로, 다른 하나는 등의 중간 부분으로 내려온다. 세 번째 브로치는 팔리움을 왼쪽 어깨에 고정시킨다. 그 다음에는 브로치 대신 바느질로 고정시키게 되는데 세 개의 브로치는 장식용으로 남게 된다. 당초 무릎까지 내려올 만큼 상당히 길었던 두 가장자리는 15세기 후에 현재의 모습대로 17세기부터 짧아졌다. 십자가로 팔리움을 장식하는 건 이미 라벤나의 모자이크에서 시작됐으며 카롤링거 시대에 더욱 늘어났다. 중세 시기 인노첸시오 3세 교황에 이르러 십자가는 붉은색이 됐다. 1761년에 선종한 쾰른 대교구장 클레멘스 아우구스투스 대주교의 팔리움에는 검은색 십자가 두 개와 붉은색 십자가 여섯 개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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